더스틴 호프먼의 비전형적 주인공과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음악 결합…교외 중산층의 안정에서 방향을 잃은 젊은 세대, 뉴할리우드 전환기 흥행작으로 확장
[KtN 최유식기자]공항의 무빙워크 위에 한 청년이 서 있다. 정면을 바라보지만 표정에는 귀환의 설렘이 없다. 이어지는 음악은 사이먼 앤드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The Sound of Silence’.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앤젤레스 집으로 돌아온 벤저민 브래독의 첫 등장은 축하보다 정체된 움직임에 가깝다. 몸은 이동하지만 스스로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1967년 12월 공개된 마이크 니컬스(Mike Nichols)의 ‘The Graduate’는 대학을 졸업한 젊은 남자가 자신의 미래를 정하지 못한 채 부모 세대가 만들어놓은 세계를 떠도는 데서 출발한다. 더스틴 호프먼(Dustin Hoffman)이 연기한 벤저민에게는 학업 성취도 있고 안정적인 가정도 있다. 주변 어른들은 앞날이 밝다고 말한다. 정작 벤저민은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못한다.
귀가 직후 열린 축하 파티에서도 벤저민은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 자기 방으로 향한다. 손님들은 대학과 진로를 묻고 미래에 대한 조언을 건넨다. 한 중년 남성은 벤저민에게 단 한 단어를 강조한다.
“Plastics.”
1960년대 미국의 성장산업을 상징하는 말이지만 벤저민에게는 미래의 가능성보다 부모 세대가 이미 정해놓은 성공의 경로처럼 들린다. 영화는 직업도, 결혼도, 경제적 안정도 정하지 못한 청년을 실패한 인물로 출발시키지 않는다. 부모가 원하는 조건을 이미 갖춘 상태에서 오히려 방향을 잃은 인물을 앞세운다.
찰스 웹(Charles Webb)이 1963년 발표한 동명 소설을 영화로 옮긴 제작자 로런스 터먼(Lawrence Turman)은 경제적으로 풍족하면서도 미래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젊은 인물에 주목했다. 각본에는 칼더 윌링엄(Calder Willingham)과 벅 헨리(Buck Henry)가 이름을 올렸고, 니컬스가 연출을 맡았다. 촬영은 1967년 4월 시작해 8월까지 이어졌다. 제작비는 당시 기록에서 약 300만 달러로 집계됐다.
니컬스에게는 두 번째 개봉 장편이었다. ‘The Graduate’ 연출을 먼저 맡았지만 제작이 늦어지는 동안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이 출연한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를 먼저 완성했고, 1966년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이듬해 나온 ‘The Graduate’는 연극계에서 넘어온 감독을 단숨에 할리우드 중심부로 옮겨놓았다.
벤저민 역에는 당시 할리우드 주연배우의 전형과 거리가 있던 더스틴 호프먼이 선택됐다.
원작 속 벤저민은 금발의 전형적인 미국 청년 이미지에 가까웠다. 호프먼은 키와 외모, 말투 모두 기존 할리우드가 젊은 남자 주인공에게 요구하던 조건과 달랐다. 영화 출연 경험도 많지 않았다. 니컬스는 여러 배우를 검토한 끝에 호프먼을 캐스팅했고, ‘The Graduate’의 성공은 비전형적인 외모의 배우도 대형 흥행작을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호프먼은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이후 미국영화의 대표 배우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
카메라도 벤저민을 영웅처럼 세우지 않는다.
로버트 서티스(Robert Surtees)의 파나비전 촬영은 넓은 프레임 안에서 벤저민을 주변 사물과 사람에게 눌린 인물로 자주 배치한다. 로스앤젤레스의 넓은 저택과 수영장, 호텔, 자동차는 경제적 풍요를 드러내지만 벤저민의 자유를 넓혀주는 공간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부모와 이웃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몸은 프레임 안에서 더 작아지거나 가려진다. 아카데미는 니컬스와 서티스가 넓은 파나비전 화면을 인물 관계와 코미디에 적극적으로 사용한 작품으로 ‘The Graduate’를 평가하고 있다.
부모가 선물한 잠수복을 입고 수영장에 들어가는 대목에서는 벤저민이 바라보는 세계가 잠수 마스크 안쪽으로 좁아진다. 부모는 수영장 가장자리에서 웃으며 아들을 지켜보고 벤저민은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풍족한 캘리포니아 중산층 가정의 수영장이 휴식 공간에서 고립된 공간으로 바뀐다.
벤저민이 머물던 방의 어항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유리 너머 물속 세계와 수영장, 잠수복이 이어지면서 집은 편안한 귀환처보다 빠져나가기 어려운 공간에 가까워진다.
앤 밴크로프트(Anne Bancroft)가 연기한 미세스 로빈슨은 벤저민의 정체된 여름을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졸업 파티가 끝난 뒤 미세스 로빈슨은 벤저민에게 집까지 차로 데려다 달라고 한다. 이어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술을 권하며 접근한다. 벤저민은 당황하고, 미세스 로빈슨은 벤저민의 반응을 기다리기보다 관계를 주도한다.
침실에서 미세스 로빈슨의 다리가 전경을 가로지르고 멀리 벤저민이 놓이는 구도는 영화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됐다. 한 프레임 안에서 유혹하는 사람과 피하려는 사람의 위치가 거리와 크기로 갈린다.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된 뒤 영화는 로맨스의 진전을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벤저민이 수영장에 몸을 띄우고 있다가 호텔 침대로 연결되고, 다시 수영장으로 돌아오는 식으로 시간이 압축된다. 집과 호텔을 오가는 여름은 날짜보다 반복으로 기억된다.
편집을 맡은 샘 오스틴(Sam O’Steen)은 서로 다른 공간의 동작을 연결해 벤저민의 무기력한 시간을 하나의 흐름으로 붙였다. 수영장에서 몸을 일으키는 동작이 호텔 침대로 이어지고, 미세스 로빈슨과의 관계도 사건의 연속보다 끝없이 반복되는 생활처럼 처리된다.
음악은 같은 역할을 더 강하게 맡는다.
‘The Sound of Silence’, ‘Scarborough Fair/Canticle’, ‘April Come She Will’ 등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노래 상당수는 ‘The Graduate’를 위해 처음 만들어진 곡이 아니었다. 이미 발표된 곡을 니컬스가 영화 안에 반복해서 배치했다. 당시 극영화에서 대중가요를 단순한 삽입곡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과 작품 전체의 리듬을 묶는 방식으로 적극 활용한 작업이었다.
폴 사이먼(Paul Simon)은 영화용 신곡도 요청받았다. 제작 과정에서 완성되지 않았던 노래 하나가 미세스 로빈슨의 이름과 연결됐고, 영화에는 완성 전 형태가 사용됐다. 이후 가사를 완성한 ‘Mrs. Robinson’은 1968년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앨범 ‘Bookends’에 수록됐다.
1960년대 이전 할리우드에서도 대중음악과 영화의 결합은 존재했다. ‘The Graduate’의 차이는 노래가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 쓰인 뮤지컬 넘버가 아니라, 이미 청년들이 듣던 음악이 반복되면서 인물의 감정을 대신한다는 데 있었다.
벤저민이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도, 혼자 수영장 주변에서 시간을 보낼 때도 ‘The Sound of Silence’가 흐른다. 인물이 자신의 상태를 대사로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음악이 공백과 고립을 채운다.
AFI 기록에는 니컬스가 영화 기획 초기부터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음악을 사용할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Mrs. Robinson’을 제외한 주요 보컬곡들은 이미 1966년 앨범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 등에 발표돼 있었다고 남아 있다. 영화 흥행 이후 사운드트랙과 기존 음반의 판매도 함께 늘었다.
벤저민이 미세스 로빈슨의 딸 일레인과 가까워지면서 이야기는 다시 방향을 바꾼다.
캐서린 로스(Katharine Ross)가 연기한 일레인은 어머니와 달리 벤저민과 같은 세대에 속한다. 부모가 결정해준 만남으로 시작하지만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진다. 미세스 로빈슨은 관계를 막으려 하고, 벤저민과 자신의 관계를 딸에게 알리지 말라고 압박한다.
벤저민에게 일레인은 처음으로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는 대상이 된다.
하지만 선택 방식까지 성숙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벤저민은 일레인을 따라 캘리포니아 버클리로 향하고, 일레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주변을 맴돈다. 결혼 소식을 들은 뒤에는 다시 자동차를 몰고 결혼식장으로 달려간다.
부모가 만들어준 삶에서 벗어나려는 행동이 다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는 성숙함으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영화의 청춘은 부모 세대의 가치에서 이탈하지만 새로운 삶의 원칙까지 갖춘 상태도 아니다.
1967년 미국이라는 시기가 여기에서 겹친다.
베트남전 개입은 확대되고 있었고 대학가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기존 제도와 권위에 대한 반발이 커지고 있었다. ‘The Graduate’에는 전쟁이나 학생운동이 전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벤저민도 정치적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부모 세대와 그 안정에 의미를 찾지 못하는 젊은 세대의 간격은 당시 관객에게 강하게 받아들여졌다. BFI는 작품이 베트남전 개입이 깊어지던 미국 사회에서 불확실성과 의심을 느끼던 젊은 관객과 연결됐다고 설명한다.
같은 1967년에는 ‘Bonnie and Clyde’, ‘In the Heat of the Night’, ‘Cool Hand Luke’, ‘Guess Who’s Coming to Dinner’도 공개됐다. 폭력, 인종, 권위, 세대 문제를 기존 할리우드와 다른 방식으로 다룬 작품들이 한꺼번에 등장한 해였다.
‘The Graduate’는 정치적 사건을 직접 다루지 않으면서 젊은 관객을 영화산업의 주요 관객으로 끌어들였다. ‘Bonnie and Clyde’의 흥행과 함께 ‘The Graduate’의 성공은 이후 할리우드가 젊은 관객과 새로운 감독에게 더 큰 비중을 두게 되는 뉴할리우드(New Hollywood) 전환기의 주요 흐름과 맞물렸다.
1967년 미국영화의 변화가 ‘The Graduate’ 한 편에서 시작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스튜디오 시스템의 약화, 텔레비전의 성장, 관객층 변화, 유럽영화의 영향과 제작규정의 붕괴가 여러 해에 걸쳐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Bonnie and Clyde’를 비롯한 다른 작품들도 같은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The Graduate’가 분명하게 확인한 것은 젊은 관객을 겨냥한 비교적 작은 규모의 영화가 할리우드 중심부에서 거대한 흥행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1967년 12월 20일 뉴욕에서 처음 공개된 뒤 21일부터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정식 상영이 시작됐다. 개봉관은 처음부터 수백 곳으로 넓게 잡히지 않았다. 8주 동안 29개 극장에서 상영한 뒤 69개 극장으로 확대됐고, 일부 지역에서는 첫 주보다 여러 주가 지난 뒤 주간 흥행액이 더 높아졌다. 입소문을 따라 상영 지역과 관객이 커지는 방식이었다.
‘The Graduate’는 1967년 개봉작 가운데 가장 큰 흥행을 기록한 작품으로 올라섰다. 제작비 약 300만 달러 규모의 영화가 세대 갈등과 불안, 연애를 앞세워 대규모 관객을 확보하면서 할리우드가 젊은 관객층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흥행 성공의 중심에는 더스틴 호프먼이라는 새로운 스타의 등장도 있었다.
1960년대 이전 미국의 대표적인 남성 스타는 키가 크고 단정하며 자신감 있는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벤저민은 말을 더듬고 사람을 피하며 실수를 반복한다. 침착한 영웅보다 불안한 관찰자에 가깝다. BFI는 호프먼의 캐스팅이 당시 할리우드 남자 주연배우의 외형적 기준에 도전했고, 흥행 성공을 통해 다른 유형의 배우가 주연이 될 가능성을 넓혔다고 평가한다.
1968년 열린 제4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촬영상, 각색상, 감독상 등 7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수상은 마이크 니컬스의 감독상 한 부문이었다. 더스틴 호프먼과 앤 밴크로프트, 캐서린 로스가 모두 연기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결혼식으로 달려가는 후반부는 벤저민이 영화 초반과 가장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부분이다.
공항 무빙워크 위에서는 가만히 서 있던 청년이 버클리와 산타바버라를 오가고, 자동차의 연료가 떨어지자 직접 달린다. 교회에 도착한 뒤 유리창을 두드리며 일레인의 이름을 외친다. 일레인은 결혼식을 중단하고 벤저민과 함께 밖으로 빠져나온다.
두 사람은 지나가던 버스에 올라탄다.
처음에는 웃는다. 결혼식장에서 탈출했다는 흥분이 얼굴에 남아 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웃음이 사라진다. 벤저민도, 일레인도 앞을 바라본다.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말은 없다.
‘The Sound of Silence’가 다시 흐른다.
벤저민은 부모가 정해놓은 미래를 거부했고 일레인은 결혼식장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버스 안의 두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설계도까지 생긴 것은 아니다. 부모 세대에서 탈출했다는 사실과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안다는 것은 다른 문제로 남는다.
영화 초반 공항의 무빙워크와 마지막 버스는 서로 다른 이동수단이지만 두 순간의 벤저민에게는 같은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 처음에는 혼자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였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선택한 사람과 함께 이동한다. 목적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1996년 미국 의회도서관은 ‘The Graduate’를 국가영화등기부(National Film Registry) 보존작으로 선정했다.
1967년 ‘The Graduate’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할리우드는 젊은 관객이 단순한 주변 소비층이 아니라 영화의 성패를 결정할 수 있는 시장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전형적인 미남 스타가 아닌 더스틴 호프먼이 중심에 섰고, 이미 젊은 세대가 듣고 있던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음악이 극영화의 정서를 끌고 갔다.
수영장과 호텔을 오가며 시간을 보내던 벤저민은 마지막에 직접 달려 결혼식장을 찾아간다. 그러나 버스가 출발한 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The Graduate’는 부모 세대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결말로 삼으면서도, 탈출 뒤의 삶을 성공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1967년 할리우드가 만난 새로운 청춘도 같은 위치에 있었다. 이전 세대가 제시한 답을 거부하기 시작했지만 다음 답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던 세대였다. ‘The Graduate’는 바로 그 공백을 더스틴 호프먼의 불안한 얼굴과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음악, 그리고 목적지를 말하지 않는 마지막 버스에 남겼다.
후원=NH농협 302-1678-6497-21 위대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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