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트빅투아르를 문자와 파편의 풍경으로 다시 구성한 1990년 대작…회화의 계보와 전위의 언어를 하나의 산 아래 겹치다

마크 탠지(Mark Tansey) 'Valley of Doubt'(1990). 세잔의 생트빅투아르 산을 문자와 단어의 콜라주로 재구성한 대형 작품이다. 뉴욕 휘트니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소장 작품으로 'Cezanne et nous'에 출품됐다. © Mark Tansey/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Ti Nighswander/Imaging4art
마크 탠지(Mark Tansey) 'Valley of Doubt'(1990). 세잔의 생트빅투아르 산을 문자와 단어의 콜라주로 재구성한 대형 작품이다. 뉴욕 휘트니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소장 작품으로 'Cezanne et nous'에 출품됐다. © Mark Tansey/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Ti Nighswander/Imaging4art

[KtN 임민정기자]마크 탠지(Mark Tansey)의 'Valley of Doubt'(1990)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멀리 솟은 산이다. 윤곽은 분명하지만 색채는 옅고, 수평으로 길게 펼쳐진 대지 너머에 놓여 있다. 세잔이 평생 반복해서 그린 생트빅투아르 산이다. 그러나 산까지 이어지는 길은 세잔의 프로방스 풍경과 전혀 다르다. 전경에는 바위와 흙 대신 거대한 문자 조각이 뒤엉켜 있다. 알파벳은 땅에 박혀 있고 일부는 쓰러졌으며, 다른 글자와 겹치면서 하나의 폐허처럼 쌓여 있다.

산은 멀리 있고 언어는 가까이 있다. 탠지는 두 요소의 거리를 이용해 20세기 말의 회화가 세잔을 바라보는 방식을 구성한다. 생트빅투아르는 자연의 대상이면서 이미 미술사적 기호가 된 산이고, 전경의 문자들은 그 산에 도달하기까지 쌓인 비평과 이론, 운동과 명칭을 떠올리게 한다.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청록빛 단색조도 중요하다. 풍경을 실제 자연색으로 재현하기보다 하나의 오래된 사진이나 인쇄물처럼 보이게 만든다. 산과 평야, 문자와 잔해가 모두 비슷한 색조 안에 놓이면서 서로 다른 시대의 이미지가 한 층으로 압축된다.

전통적인 풍경화라면 전경에서 중경, 원경으로 갈수록 공간이 열리면서 시선이 산으로 이동한다. 'Valley of Doubt'에서는 그 흐름이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 전경의 문자 파편이 길을 막고, 중경에는 반복되는 수평선이 겹겹이 놓인다. 산은 분명 보이지만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위치에 남는다.

이 거리에서 작품의 긴장이 생긴다.

세잔에게 생트빅투아르 산은 끊임없이 바라보고 다시 그리는 실제 대상이었다. 형태와 색, 깊이와 평면의 관계를 반복해서 실험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탠지가 1990년에 같은 산을 다시 불러냈을 때 생트빅투아르는 더 이상 순수한 자연 풍경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세잔 이후 수많은 화가와 비평가, 미술사 서술을 통과한 이미지가 됐다.

탠지는 산 앞에 문자들을 놓으면서 바로 그 시간을 드러낸다.

알파벳은 읽기 위한 문자의 기능을 잃고 물질처럼 변한다. 단어를 완성하기보다 부서지고 겹치며 바위나 잔해와 비슷한 상태가 된다. 언어는 의미를 설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풍경을 차지한 하나의 물체가 된다.

그 변화가 작품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미술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언어가 어느 순간 미술을 바라보는 시야를 가릴 수도 있다는 역설이 생긴다. 산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관객과 산 사이에는 수많은 문자와 흔적이 놓여 있다.

20세기의 미술은 수많은 '-ism'과 함께 움직였다. 입체주의와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미니멀리즘, 개념미술처럼 작품은 운동의 이름으로 분류됐고 비평의 언어 속에서 위치를 부여받았다. 'Valley of Doubt'의 전경을 그런 특정 사조의 목록으로 단정할 근거는 없지만, 문자 자체가 폐허의 풍경을 이루는 구성은 미술과 언어가 맺어온 관계를 강하게 환기한다.

탠지가 선택한 생트빅투아르라는 대상도 우연한 풍경으로 읽기 어렵다. 세잔은 20세기 현대회화의 중요한 출발점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 잡았고, 생트빅투아르는 세잔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다. 탠지는 세잔의 회화 양식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잔이라는 존재가 한 세기 동안 얼마나 많은 해석과 역사적 의미를 축적했는지를 풍경 자체로 만든다.

산의 윤곽은 작품에서 가장 단순한 부분에 가깝다. 전경의 복잡한 문자와 달리 생트빅투아르는 몇 개의 큰 면과 선으로 정리돼 있다. 멀리 갈수록 이미지가 단순해지고, 가까이 올수록 정보가 복잡해진다. 자연보다 자연을 설명하는 인간의 언어가 훨씬 복잡한 풍경을 만드는 셈이다.

산 아래 펼쳐진 대지에는 수평선이 계속 겹친다. 밭처럼 보이는 규칙적인 구획과 불규칙한 흔적이 반복되면서 시선이 쉽게 산으로 뛰어가지 못하게 한다. 전경의 혼란에서 원경의 산까지 이동하는 과정 자체가 작품을 읽는 시간이 된다.

제목 'Valley of Doubt'도 이런 구조와 맞물린다. 작품에서 계곡은 단순한 지형만으로 읽히지 않는다. 산에 이르기 전 통과해야 할 넓은 영역 전체가 불확실성과 복잡성을 안고 있다. 다만 제목의 'Doubt'가 특정 철학이나 역사적 사건을 직접 가리킨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작품에서 확실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산과 관객 사이에 놓인 거대한 장애와 거리다.

세잔의 생트빅투아르와 비교하면 차이는 더 선명하다. 세잔은 산을 반복해서 바라보면서 자연을 회화의 구조로 바꾸었다. 탠지는 이미 미술사가 된 세잔의 산을 가져와 언어와 기억의 구조 속에 다시 놓는다.

세잔에게 산이 회화를 새롭게 만들기 위한 대상이었다면 탠지에게 산은 이미 만들어진 미술사를 되돌아보기 위한 대상에 가깝다.

'Valley of Doubt'에는 사람의 모습이 거의 중심에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만든 언어가 전경 전체를 차지한다.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문자가 남고, 문자는 돌처럼 굳어 풍경의 일부가 된다. 문명과 자연, 회화와 비평의 관계가 한 공간에서 뒤섞인다.

청록빛 단색조도 이런 시간의 중첩을 강화한다. 작품은 현재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라기보다 이미 기록되고 복제된 어떤 이미지처럼 느껴진다. 회화가 사진을 닮고, 풍경이 문서처럼 보이며, 문자들은 다시 자연물처럼 변한다. 탠지는 서로 다른 이미지 체계를 한 작품 안에서 교환한다.

그래서 'Valley of Doubt'는 세잔에 대한 단순한 오마주로 끝나지 않는다. 세잔을 존경하는 방식보다 세잔 이후 미술이 얼마나 많은 언어와 해석을 축적했는지를 되묻는 쪽에 더 가깝다.

산은 여전히 멀리 서 있다. 세잔의 생트빅투아르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산을 바라보는 20세기 말의 시선 앞에는 한 세기 동안 쌓인 미술사의 언어가 놓여 있다.

마크 탠지는 그 언어를 설명문으로 적지 않았다. 문자 자체를 부수고, 넘어뜨리고, 땅에 묻어 풍경으로 만들었다.

'Valley of Doubt'에서 세잔의 산은 목적지라기보다 기준점에 가깝다. 그곳으로 곧장 돌아갈 수는 없다. 세잔 이후의 미술이 남긴 수많은 이름과 개념, 해석의 층을 지나야 한다. 1990년의 탠지가 생트빅투아르 앞에 만든 것은 하나의 풍경이라기보다 현대미술이 자신의 역사를 바라보는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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