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에서 여백으로 이어진 비대칭 적층…원형방황과 세계축 사이에 놓인 2026년 연필 작업

최혜정(CHOI HyuJung)  사진=ATELIER AMIS
최혜정(CHOI HyuJung) 사진=ATELIER AMIS

[KtN 박준식기자]종이 하단을 짙은 검정이 넓게 누르고, 그 위로 크기와 농도가 다른 둥근 형상들이 비스듬히 맞닿아 올라간다. 아래쪽의 형상은 묵직하고 어둡지만 위로 갈수록 크기가 줄고 윤곽도 옅어진다. 가장 높은 형상 위에는 넓은 여백이 남아 있다. 최혜정(CHOI HyuJung)의 2026년작 ‘축-axis mundi’는 강한 물질적 밀도에서 출발해 점차 가벼워지는 수직의 흐름을 연필로 구축한다.

작품명에 포함된 악시스 문디(axis mundi)는 하늘과 땅, 인간과 초월적 영역을 잇는 세계축을 가리킨다. 최혜정의 세계축은 곧게 세운 기둥이나 좌우대칭의 건축물로 나타나지 않는다. 둥근 형상들은 중심선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고, 서로 맞닿는 면도 넓지 않다. 위를 향한 방향은 유지되지만 균형은 언제라도 달라질 수 있는 상태로 남는다.

검정의 무게는 하단에 집중돼 있다. 넓고 짙은 형상이 종이 아래를 차지하면서 시각적인 중력을 만들고, 그 위에 놓인 형태들은 검정의 압력을 조금씩 덜어내며 상승한다. 위로 이동할수록 흑연의 농도는 회색과 옅은 윤곽으로 바뀐다. 수직의 흐름은 크기뿐 아니라 명암의 단계로도 만들어진다.

서로 다른 형상은 한가운데에 정확히 포개지지 않는다. 접촉면은 좌우로 조금씩 이동하고 전체 적층도 미세하게 기울어 있다. 중심은 처음부터 주어진 축이 아니라 무게와 크기가 다른 형태들이 접점을 조정하며 만들어낸 결과에 가깝다. 안정은 완성된 상태보다 흔들림을 견디며 유지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Circle1–geometry’와 ‘Circle2–geometry’에서 반복됐던 원의 성격도 달라졌다. ‘Circle1’의 원은 겹침을 통해 꽃잎꼴 모듈을 증식했고, ‘Circle2’의 두 중심은 서로의 회전 반경에 개입했다. ‘축-axis mundi’에서는 원형에 가까운 단위들이 회전하지 않고 위로 이어진다. 순환하던 운동이 방향을 얻으면서 수평의 확산은 수직의 적층으로 바뀐다.

최혜정 CHOI Hyu Jung 축-axis mundi Year 2026 Medium Pencil on paper Dimensions 65x35Categoryflat painting
최혜정 CHOI Hyu Jung 축-axis mundi Year 2026 Medium Pencil on paper Dimensions 65x35Categoryflat painting

2021년 ‘액체정원’에서 원은 다수의 꽃을 품은 군락의 외곽이었다. 에폭시 수지로 만든 형상들은 검은 원 안에 밀집해 하나의 물질체를 이뤘다. ‘Circle–geometry’에서는 군락의 표면이 연필선과 기하학적 중첩으로 이동했고, ‘축-axis mundi’에서는 둥근 단위가 서로 기대며 위를 향한다. 원은 군집의 경계에서 생성의 규칙으로, 다시 방향을 세우는 단위로 변해왔다.

적층 주변을 지나는 가느다란 선은 수직의 흐름과 다른 움직임을 만든다. 선은 한 방향으로 곧게 뻗지 않고 주변을 크게 돌아 다시 비슷한 구간으로 되돌아온다. 옅은 선들이 둥근 형상 주위를 맴도는 동안 중앙의 적층은 비스듬한 상태에서도 상승을 이어간다.

독일어 링반데룽(Ringwanderung)은 방향 감각을 잃은 사람이 직선으로 걷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원을 그리며 되돌아오는 현상을 뜻한다. 작품 주변의 선은 같은 범위를 반복해서 도는 움직임과 닮아 있다. 중심부에서는 방향을 세우려는 적층이 이어지고, 그 주위에서는 출구를 찾지 못한 궤적이 되풀이된다.

원형방황과 세계축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처럼 보이지만 작품 안에서는 분리되지 않는다. 방향을 잃고 주변을 맴도는 선이 있기 때문에 중앙의 수직성이 더욱 선명해지고, 기울어진 적층은 완전한 직선이 아니기 때문에 방황의 흔적을 품는다. 최혜정의 축은 혼란을 제거한 뒤 세워진 질서보다 방황 속에서 잠시 확보한 방향에 가깝다.

연필은 검정을 균일한 색면으로 만들지 않는다. 하단의 짙은 부분에는 선을 여러 차례 겹친 흔적과 압력의 차이가 남아 있고, 회색의 형상에는 종이의 결이 비친다. 위쪽의 옅은 윤곽은 형태를 완전히 닫지 않으며 주변의 흰 공간과 섞인다. 같은 연필 안에서도 채움과 비움, 중량과 가벼움이 단계적으로 나뉜다.

여백은 적층이 끝난 뒤 남은 빈 곳이 아니다. 형상의 농도가 옅어질수록 종이의 흰 면이 차지하는 비중은 커지고, 최상단에서는 여백이 형태보다 넓은 공간을 확보한다. 작품은 위쪽에 도달한 세계를 구체적인 이미지로 채우지 않는다. 방향은 제시하지만 도착지는 비워 둔다.

아스트랄계(astral plane)나 힌두 사상의 층위와 나란히 놓으면, 하단의 검정에서 회색과 옅은 윤곽으로 이어지는 변화는 물질적 밀도를 덜어내며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접근하는 흐름으로 읽힌다. 다만 여러 형상의 수를 특정한 종교적 단계에 맞추기보다 농도와 크기, 여백의 변화가 만드는 상승감을 살피는 편이 작품의 구성에 가깝다.

최혜정 CHOI HyuJung 축-axis mundi Year 2026 Medium Pencil on paper Dimensions 53.5x72.5 Category flat painting
최혜정 CHOI HyuJung 축-axis mundi Year 2026 Medium Pencil on paper Dimensions 53.5x72.5 Category flat painting

최상단의 여백은 초월을 완성된 모습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아래의 형상들이 물질적 무게를 지니고 있다면 위쪽은 정의되지 않은 상태로 남는다. 세계축은 두 영역을 잇지만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경계와 그 너머를 동시에 드러낸다. 채워진 형상보다 비어 있는 공간이 더 긴 여운을 남기는 이유다.

비대칭의 적층과 넓은 여백, 흑연을 반복해 쌓은 검정은 한국 현대미술이 지속적으로 다뤄온 채움과 비움의 관계와 맞닿는다. 전통적 탑이나 제의적 도상을 직접 옮기지 않으면서도, 무게가 다른 형상을 완전한 대칭으로 교정하지 않고 서로 기대게 한 방식에서 균형에 대한 다른 감각이 드러난다.

한국적 조형성은 특정한 전통물을 닮았다는 데서 결정되지 않는다. 검정을 축적한 시간과 종이의 흰 면을 남긴 비율, 정확한 중심을 피한 접촉, 불완전한 균형을 그대로 유지한 제작 태도에서 구체성을 얻는다. 가득 채운 하단과 비워 둔 상단은 대립하면서도 서로의 위치를 결정한다.

‘축-axis mundi’는 기하학과 영성을 결합하는 동시대미술의 흐름 안에서도 구별되는 면을 갖는다. 세계축과 초월, 에너지 같은 개념을 상징만으로 내세우지 않고 흑연의 농도와 형상의 크기, 좁은 접촉면과 여백의 비율로 바꿔 놓았다. 철학적 언어가 작품을 대신하기보다 실제 구성에서 의미를 얻는 방식이다.

세계 컨템포러리 아트 시장은 고가 부문의 위축과 거래 저변의 확대가 동시에 진행되는 국면에 놓여 있다. 2024년 7월부터 2025년 6월까지 100만 달러 이상 낙찰 건수는 전년보다 29% 줄었고 전체 거래액도 14억4000만 달러로 감소했다. 같은 기간 5000달러 미만 작품의 거래는 9% 늘었으며, 거래 작품 수는 14만6750점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더 다양한 작품과 작가가 유통되는 흐름 속에서 일관된 제작 언어와 연작의 축적이 더욱 뚜렷한 구분점으로 들어오고 있다.

한국 미술시장도 2021년의 급격한 팽창을 지난 뒤 조정기에 들어섰다. 국내 공개경매 거래액은 2021년 2억3700만 달러를 넘기며 세계 6위까지 올랐고, 2024년에는 7060만 달러로 줄었다. 거래 규모가 축소된 뒤에도 국제 갤러리의 서울 진출과 주요 한국 작가에 대한 수요는 이어졌다. 빠른 시장 성장 이후 K아트는 개별 작가가 축적한 형식과 사유의 지속성을 더 면밀하게 살피는 단계로 옮겨가고 있다.

KtN 전시 현장.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전시 현장.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최혜정의 작업은 에폭시 수지의 꽃 군락에서 연필로 그린 원의 중첩, 다시 수직으로 이어진 둥근 형상으로 변화했다. 재료와 구도는 달라졌지만 반복된 단위를 쌓아 밀도를 만들고, 검정과 여백의 비율로 시선의 방향을 조절하는 방식은 이어진다. ‘축-axis mundi’는 앞선 작업의 조형 문법을 끊기보다 수직의 질서로 재배치한다.

작가가 작업 세계를 설명하며 사용한 “신과 인간의 시·서·화의 놀이터”라는 문구는 넓은 사유의 범위를 포괄한다. 작품의 구체적인 긴장은 포괄적인 선언보다 하단을 누르는 검정과 좁은 접촉면, 기울어진 적층과 끝내 채워지지 않은 상단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신과 인간의 거리는 개념의 설명보다 형상과 여백의 차이로 표현된다.

최혜정의 세계축은 흔들림을 제거한 완전한 기둥이 아니다. 서로 다른 무게를 지닌 형상들이 좁은 면으로 맞닿아 있고, 중심선은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이동한다. 축을 유지하는 힘은 견고한 대칭보다 접점이 무너지지 않도록 계속 균형을 조정하는 데서 나온다.

‘액체정원’에서 흐르던 물질은 꽃의 외형으로 굳었고, ‘Circle–geometry’에서는 원이 겹치고 충돌하며 관계를 만들었다. ‘축-axis mundi’에 이르면 순환하던 형태가 아래에서 위로 방향을 세운다. 최혜정의 작업은 물질에서 선으로, 군락에서 기하학으로, 원의 반복에서 세계축으로 이동하면서 검정과 여백, 축적과 편차라는 조형 문법을 이어간다.

상단의 여백은 상승의 끝을 선언하지 않는다. 아래에서는 짙은 무게가 버티고, 중앙에서는 접촉이 흔들리며, 주변에서는 원형의 궤적이 계속 되돌아온다. ‘축-axis mundi’에 남은 것은 초월에 도달한 결과보다 방황 속에서도 접점을 다시 맞추며 방향을 유지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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